한국기독역사여행] 역적이 된 이단아, 기독교 유입 물꼬 트다

서울 양화진 성지와 ‘대역부도’ 김옥균

 
[한국기독역사여행] 역적이 된 이단아, 기독교 유입 물꼬 트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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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화진은 지금 합정동 절두산 일대를 말한다. 크리스천에게는 절두산 옆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의 묘원과 절두산은 각각 신·구교의 성지다.

절두산은 18세기 초만 해도 용두봉 또는 잠두봉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버들강변이었다. 세종 32년 명나라 사신이 이 봉우리에 올라가 “적벽과 다름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이곳은 천주교인들의 목을 치는 장소라 해서 절두산(切頭山)이 됐다. 이 무렵부터 양화진은 나루터(津)나 수군 주둔지(鎭)의 이미지에서 박해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1866년 9월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에 정박해 측량을 하고 조선 사정을 염탐했다. 무력한 조선 조정은 아무런 반격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10월 일곱 척의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선교사를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고 통상조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물리쳤다. 그것이 병인양요이다. 기세가 오른 흥선대원군은 ‘천주학쟁이’들을 절두산에 모아 집단 참수했다. 바로 병인박해다.

이 성지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일이다. 구식군대는 부패한 왕권과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일본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관원들을 때려 죽였다. 그때 일본 하나부사 공사가 간신히 몸을 피해 양화나루에서 배를 탔다고 한다.

이 양화진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1893년. 한국 초대 선교사 존 헤론(1856∼90)이 지금의 묘원에 묻혔다. 묘원의 시작이었다. 당초 그의 시신은 서울 정동 미국공사관에 묻혔지만 외국인 시체를 도성 안에 두는 건 흉조라는 여론이 등등하자 사망 3년 후 양화진으로 이장한 것이다.

양화진 저잣거리에 효수된 김옥균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양화진에 대한 한국기독교 역사이다. 그런데 이듬해 1894년 4월 15일 몸서리쳐지는 장면이 조선 조정에 의해 연출된다. 갑신정변(1884) 주역 김옥균(1851∼94)의 잘린 머리가 양화진 저잣거리에 효수된 것이다. 길거리에 걸린 머리 위에는 한자로 ‘대역부도 옥균(大逆不道 玉均)’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역죄인 김옥균이란 뜻이다.

김옥균이 명확하게 크리스천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고 아니라는 기록도 없다. 중요한 건 시대의 풍운아이자 혁명가였던 그가 개신교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 유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하나님의 운행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김옥균은 고종의 최측근 엘리트 관료로서 세계 질서의 흐름을 읽어내고 국가와 민족공동체에 기독교 가치를 심어줄 필요가 있다는 걸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는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엘리트들과 함께 근대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김옥균은 무엇보다 천주교의 거친 전도 방식의 한계를 깨달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개신교 방식의 교육과 의료술 유입을 주창했다. 정책적 판단이었다. 당시 백성은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반면 위정척사파를 중심으로 한 권력층은 기독교를 사교(邪敎)로 규정, “예수교를 믿으면 금수와 같이 된다”고 극렬 반대했다.

1872년 장원급제한 김옥균은 서재필 김홍집 박규수 홍영식 서광범 등과 이웃했다. 그가 사는 서울 북촌을 개화사상의 산실로 삼았다. 개화는 곧 서학이었고, 서학의 본질은 기독교 사상이었다.

열린 사고에 다재다능했던 그는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미국 로버트 매클레이(1824∼1907) 선교사 부부 등과 교유했다. 그리고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정부 요직을 거치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던 그는 1884년 6월 조선 선교를 위해 입국한 매클레이를 다시 만났다.

그때 매클레이는 학교와 병원 설립안을 김옥균에게 전하며 고종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김옥균은 선교안이 ‘가납되었음’을 7월 3일 밤 선언했다. 푸트 미국 공사와 통역 윤치호가 동석한 가운데 조선 정부의 제안서 승인이 이뤄졌다. 이는 곧 학교와 병원 내에서 제한적 선교를 허용한 것으로, 한국 선교역사의 시작이었다.

김옥균은 그해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1882년부터 수구파인 명성왕후와의 권력 갈등이 축적된 결과였다. 이 정변은 ‘3일천하’로 끝났다. 이때 개화파 동지였던 민영익이 낙성식에서 자객에게 자상을 입었고 이를 의사였던 알렌(1858∼1932) 선교사가 치료했다. 고종은 첫 근대병원 광혜원(제중원 전신) 원장을 알렌에게 맡겼다. 이 광혜원은 매클레이가 제안하고 김옥균이 검토한 병원이었다. 헤론도 알렌에 이어 원장을 맡았다. 비록 김옥균은 역적이 됐지만 의료와 교육 선교는 계속 이어진 셈이다.

한국정부 입장에서 본 개신교 전래

한국교회는 개신교의 전래를 1885년 4월 5일 부활절로 잡는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제물포 입항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합의된 연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복음 전래는 1832년 독일 출신 선교사 귀츨라프의 충남 보령 고대도 전도를 시작으로 끊임없는 노크가 있었다. 1866년 소위 제너럴셔먼호의 대동강변 통상 요구 때 이 배에 타고 있던 토머스 선교사가 백성에게 성서를 전하다 순교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에 복음을 누가 먼저 전했느냐는 타자의 시선이다. 최초의 선교사, 병원, 학교 또 최초의 한국인 교인, 장로, 목사 등 명예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할 수만은 없다. 백성이 왜 복음을 원했으며, 정부가 왜 백성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이를 누가 이끌고 결정했느냐는 주체적 역사관도 필요하다.

타자의 시선에 따른 측면에서 보자면 김옥균은 논외의 인물이거나 조연일 뿐이다. 하지만 성서의 본문이 처한 당시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듯 우리 역사 또한 당시의 ‘문맥’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평등과 구원’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19세기 조선에 김옥균은 바로 이 두 개념이 기독교 가치관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를 허용하는 것이 봉건시대 낡은 관습에 얽매인 조선을 개화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것이다.

지난 16일 지하철 합정역 출구를 나와 묘원으로 향하는 성지길. 기독 전문서점 양화진책방과 홍성사, 그리고 한국백주년기념교회 본당과 부속건물, 성지공원 등 소위 양화진 일대가 순례길이자 미션타운의 분위기다.

사료에 따르면 중국에서 운반된 김옥균 시신은 양화진 임시 형장에서 머리와 사지가 찢겼다. 그리고 잘려진 그의 머리는 ‘번창한 길목에 여러 날 동안 세워져 있었다’고 적혀 있다. 천주교인과 선교사들을 참수하던 땅 양화진과 그는 전혀 무관했는데도 “도성에 역적을 들일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옥균은 이단아 or 혁명가?

김옥균은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0년 뒤인 1894년 3월 28일 극우 민족주의자 홍종우에 의해 중국 상하이로 유인돼 죽임을 당했다.

청나라는 그 시신을 군함에 실어 톈진에서 제물포항까지 보냈고 이를 인수한 조선은 양화진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했던 것이다. 고종의 비서실장과 다름없던 권력자는 천하의 역도가 된 것이다.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주장한 김옥균. 그의 육신은 양화진에서 산화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 145인의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이 묻혔다. 어쩌면 김옥균은 역사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택한 도상의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가 비록 ‘시대의 이단아’로 불릴지라도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평등한 세상을 실천하려 했던 ‘인간 김옥균’으로 한번쯤은 봐줬으면 한다. 양화진에는 ‘대역부도 옥균’이 있다.

김옥균과 기독사상

“인간은 하나님 아래 평등… 백성 계몽해 근대국가 이루려”


“조선 말 개신교는 천주교와 결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백성은 조선 정부보다 구제에 앞장선 교회를 상위 개념으로 보았어요. 관리들의 수탈을 피하기 위해 교회로 모이기도 했죠. 그 교회에서 하나님 아래 평등한 인간임을 깨달았어요. 김옥균은 매클레이 선교사 부부와의 교류를 통해 이처럼 교회에 의지하려는 백성의 흐름을 꿰뚫어 본 거죠.”

근대역사학자 박은숙(60) 박사는 ‘갑신정변연구’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등을 펴낸 김옥균 연구 전문가다. 지난 17일 서울 암사동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김옥균이 기독교적 가치를 이해하고 교육·의료 선교 허용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했다”고 단언했다. 이어 “김옥균은 서구적 가치, 즉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백성을 계몽 대상으로 삼아 근대국가를 이룩하려 했던 인물”이라고 했다.

평등과 천부인권 같은 김옥균의 생각과 사상은 흥선대원군이 주도하며 남긴 수구파가 득세하던 당시의 조선 조정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10년 뒤 갑오경장을 통해 99% 실현됐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따라서 한국 교회는 이식된 기독교라는 인식에 앞서 김옥균과 같은 국가 정책 입안자들이 복음을 먼저 받아들이려는 자율적 여건을 조성해 왔음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글=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